김영하 흡혈귀 작품분석
본문 저는 스물 일곱 살의 여자입니다. 72년생이죠. 인생이 희망으로 가득하다고 믿고 있을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을, 그런 나이입니다. 제 이야기를 잠깐 할까요. 여느 소녀들처럼 어린 시절엔 재미있는 소설과 만화를 보며 자랐습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같은 순정만화나 하이틴 로맨스, 할리퀸 문고 따위에 빠져들기도 했지요. 그런 소설과 만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닮은 멋진 남자들을 기다리며 사춘기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테리우스나 미스터 블랙 같은 인물 말이죠. 그러다 대학에 들어갔지요. 90년이었습니다. 대학 생활은 다른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지요. 1학년 때는 헤매다가 2학년쯤 되면 시들해지고 연애도 한 번 하게 되죠. 저도 남자 하나를 만났는데 그렇고 그런 남자였어요. 차 마시면 돈은 당연히 자기가 내고, 여자가 담배 피면 세상 말센줄 알고, 술 취하면 전화하고 뭐 그런 남자요. 한국 땅에 흔해빠진 남자였어요. 처음엔 아, 저 남자가 날 저렇게까지 끔찍하게 생각해 주는구나 싶어서 좋았는데 금세 지겨워졌어요. 그래서 헤어지고. 지겨운 3학년과 4학년이 지나가고 있었죠. 그러다 또 남자 하나를 만났는데 이 남자는 달랐어요. 늪이었어요. 말 그대로 늪. 영화 공부하는 사람이었어요. 열정적이고 세상 물정 모르고 미친 듯이 사는 남자. 멋져보였어요. 친구 애인이었는데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제가 미쳤죠. 맞아요. 그때 목숨 걸었어요. 그 남자 사는 집에 찾아갔어요. 생각보다 쉬웠어요. 아무 것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죠. 둘 다 젊었으니까요(이 부분에서 다소 장황하게 그 남자와 만나게 된 경과를 서술하고 있어 일부 생략했다 : 필자). 나중에 알게됐지만 그 남자 언제나 그런 식이었어요. 여자한테 다가가지는 않지만 오는 여자는 막지 않아요. 그때마다 여자를 갈아치우는 건데, 별 죄의식 같은 건 가지지 않는 남자였어요. 자기는 그럴 만큼 충분히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럴 때 도덕 같은 거 들이대면 비웃어버려요. 낡았다는 거죠. 그 남자 처음 만났을 때, 운동권 영화를 만들고 있었어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16미 본문내용 독자들 중에는 작가인 나와 그 자살안내인을 같은 사람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대뜸 전화를 걸어와서는 자신이 지금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뭐 해줄 말이 없느냐는 식이다. 오죽하면 나같은 사람에게까지 그러겠는가 싶어 안쓰럽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난감한 노릇이다. 오늘 소개할 이 편지도 그런 것 중의 하나려니 하고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었다. 편지는 A4 용지 크기의 봉투에 담겨 두툼했다. 주소는 컴퓨터로 깔끔하게 인쇄된 것이었고 소인은 서울 도곡동 우체국으로 찍혀있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역시 워드프로세서로 정서한 열 장 가량의 종이가 묶여있었고 그밖에 수십 장의 다른 복사지들이 함께 들어있었다. 그 복사지 묶음의 맨 앞장에는 참고 자료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쓰여있었다. 원고청탁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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